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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kswagen History

Volkswagen History

1934-1939

1934-1939

1934

1934년 1월 17일, 새로운 독일 정부는 페르디난드 포르셰(Ferdinand Porsche)라는 사람으로부터 국민차 ‘폭스바겐’의 디자인 제안서를 받았다. 얼마 후 독일 자동사 산업 연합회 RDA(Reichsverband der Automonilindustrie)와 포르셰간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한 달에 2만 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 옛 독일의 화폐단위) 예산으로 포르셰는 10개월동안 국민차 견본을 생산하는 조건이었다.
그 당시 독일 자동차 공장들은 부유층 고객들을 위한 고급 차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반면, 포르셰는 적절한 소형차를 만들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독일 정부의 압력 때문에 공식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RDA에게는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 포르셰는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독일 자동차 업계는 소형차 프로젝트가 차라리 실패하기를 바랬다

1935

자동차 산업의 부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맡은 팀은 포르셰 개인 작업실에서 “대중을 위한 차”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에 착수하였다. 기술적 난관과 이상적인 해결책 강구로 인해 계약기간을 12개월 더 늘려야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포르셰는 그의 팀과 “국민차”에 대한 여러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모두 비교하거나 경쟁하는데 대한 두려움이 없는 믿음직하고 경제적이며 무엇보다도 완벽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그의 결심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비용에 상관없이 단지 이상적인 솔루션을 만들겠다는 목표 하에 창틀, 엔진, 변속장치 등의 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값싼 부품으로 대체할 수 있었음에도 전속력을 견디는 내구성을 위해 값비싼 공기 냉각형 수평 대립 엔진을(air-cooled horizontally opposed engine) 선호하였다.
안정성을 위해 바닥은 값싼 철판과 나무 혼합 대신 얇은 금속판으로 전체 마감되었다. 포르셰가 만든 토션 바(torsion bar) 완충장치는 최고의 주행 안정성과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하였다. 또, “국민차”가 승객에게 제공하는 편이성은 타 차량들과 비길 데가 없었다. 도구는 잘 정리되었고 표준에 맞게 난방이 되었는데 그 당시 더 큰 자동차들도 제공하진 못하는 난방 수준이었다.
1935년 10월 첫번째 견본 모델이 비밀리에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이 디자인이 훗날 독일 제품의 품질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제품 중의 하나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차는 매우 이상해보였고 마지막 디자인과 상당히 달랐다. 두드러진 후면 창과 운전대, 범퍼가 아직 디자인되지 않았다. 헤드라이트는 여전히 트렁크 문짝에 있었다. 문은 후면에 달려있었고 1938년 최종 견본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후속 모델과 비교해볼 때 철제 차체, 5인용 공간, 다른 디자인과 구분되는 만족스러운 성능 등 “국민차” 초기 견본은 현대 소형차 구조의 표본이 되고 있다.
더욱이 기술적인 관점에서 경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차는 자동차 업계에 있어 한편으로는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국민들의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1936년에는 49명중 한명 만이 차를 소유했었다.

1936

RDA 회원사 어느 곳도 자사 공장에서 “국민차” 생산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1936년 중반에 폭스바겐 공장 건설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들은 개별 기업에 대한 정치 압력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포르셰는 “국민차” 생산계획에 가장 적합한 생산 기술을 관찰하고 배우기 위해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계획된 생산량은 유럽 공장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연간 1백만대였다. 이것이 폭스바겐도 1961년에서야 생산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데서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알 수 있었다.
1936년 10월부터 12월까지 VW3 시리즈의 5만 킬로미터 주행테스트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국민차” 개발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Kienzle trip recorder의 도움으로 무엇이 생산되었으며 어떤 것이 첫번째로 사용되었는 등 모든 것이 세심하게 기록되었다. 테스트는 사실상 영구적이었다.
포르셰의 직원들은 하루에 800킬로미터씩 달렸다. 필요한 정비는 밤에 이루어졌다. 다음은 최종 테스트 평가 요약문이다.
“이 차는 . . 미래의 자동차 발전을 보장하는 특성들을 갖고 있는 차이다.”

1937

1938년 마지막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견본 생산에 들어간 비용은 3천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다. 이전까지 만들어진 자동차를 볼 때 이는 매우 적절한 금액이었다.
이 제품을 진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독일 정부는 German Labor Front 수뇌에게 폭스바겐 공장과 마을에서 “국민차”를 생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전략적이고 비즈니스적으로 고려할 때 적절한 위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것은 공장이 독일 중심에 위치하고 주요 운송 루트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GEZUVOR(Gesselsxhaft zur Vorbereitung des Volkswagens – 폭스바겐의 발전을 위한 공장)이 1938년 5월28일 착공되었다.

1938

9월16일 GEZUVOR이 Volkswagenwerk GmbH이 되었으며 10월 13일 상업단체로 등록되었다. 등록 사무소는 1948년까지 베를린에 있었다. 회사의 지출은 DAF기금과 맞먹었는데 폭스바겐 제품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특별 구제 계획으로 자금을 조달해야만 했다: 완성차가 배달된 후에야 지급될 수 있도록 돈은 계좌로 입금된다. 이것은 곧 일주일에 5마르크씩 입금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그 때의 한계였다.
첫번째 “국민차”가 생산되었다. 1938년 7월3일자 뉴욕 타임즈에서 풍자적으로 쓴 것처럼 이것이 바로 “비틀”이었다. 이는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던 VW38의 견본 제품 중 하나로 테스트 중에도 선전이 진행되었다.
테스트의 하나로 폭스바겐은 Grolockner alpine road를 주행하였다. 테스트 결과 두 명을 태운 비틀은 해발 1,232미터에서 21분 54.4초 만에 평균속력 34.5km/h로 12.6킬로미터를 주행하였다. 한 자동차 기자는 “훨씬 더 큰 자동차도 이 속력을 내기 위해서는 25분에서 26분이 소요된다 – 이 ‘즐거움에 걍력함을 더한’ 자동차는 다른 자동차들을 경사길로 내몰았다 . . . “
1938년 5월26일 팔러슬레벤(Fallersleben) 마을 근교에 폭스바겐 공장의 초석이 세워졌다. 제작 공장 건설이 2월에 시작되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공장 건설의 공식 시작은 이 날이었다. 1938년은 “’즐거움에 강력함을 더한’ 자동차의 고장”이라는 임시 이름을 가진 마을이 처음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1939

4월까지 공장 설비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공장 건설이 가속화되었다. 기계 설비는 미국에서 수입되었다.
폭스바겐은 독일 전역에 선전을 단행하였다. 유선형 차체를 가진 Type64(40bhp, 140km/h) 특별판은 베를린에서 로마까지 장거리 운행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자동차는 세계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사용할 수 없었다.
폭스바겐 공장 건설이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비틀로 알고있는 제품은 그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1938년 8월 1일부터 1939년 말까지 17만 예금구좌가 이 ‘즐거움에 강력함을 더한’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 개설되었다.
Volkswagenwerk GmbH는 2,930ha를 소유하였으며 이중 755ha가 미텔란트 운하(Mittelland Canal) 북쪽에 위치하였다. 4,826명이 일하고 있었으며 전체 마을의 중심을 폭스바겐이 소유하고 있었다. 오늘날 볼프스부르크(Wolfsburg)의 폭스바겐 주식회사(Volkswagen AG) 공장 부지는 740ha로 이루어져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교육 공장이 완성되었다. 자격 있는 엔지니어들과 전문가들이 주 공장을 위해 이곳에서 교육 받았다. 전쟁의 발발로 1년차 직원들만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 당시 거래액(turnover)은 제로였으며 1939년 말까지 Volkswagenwerk는 5백만 라이히스마르크를 손해봤다